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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ia: Epilepsy Commu > Volume 3(2); 2021 > Article
뇌 연구의 역사 4: 뇌의 작동 방식은? 국소화론 대 전체론

Abstract

Luigi Galvani exposed the nerves of the frog leg and demonstrated twitching of the attached muscles by electrical stimulation. He could also elicit twitching of the corresponding muscles by simple metallic tapping of the nerve. Giovanni Aldini performed a theatrical demonstration of reanimation of a dead body by electrical stimulation, which also supported this view. At the start of the 19th century, Franz Joseph Gall and Johann Spurzheim proposed that the brain could be divided functionally into many parts. They also argued that the functional dominance of each individual human produced different patterns of brain development, resulting in different skull features. The basic idea that the brain was not one functional unit, but a collection of many anatomical units with different functions, was remarkable. A holistic view of brain function was reemphasized by Marie-Jean-Pierre Flourens. Flourens, who deeply believed in laboratory science, found no apparent functional changes after ablation or electrical stimulation of parts of the brain, mainly in birds. Through these experiments, Flourens harshly rebuked the idea of phrenology. Beyond this anti-phrenological role, Flourens conducted important experiments revealing the functions of the cerebellum, pons, and semicircular canals. The first widely accepted localized human brain function was language. Paul Broca presented his famous case who had developed motor aphasia with a left inferior frontal focal lesion. Eduard Hitzig and Gustav Fritsch performed an important experiment in which they identified the motor cortex of the dog brain. Finally, the excitability of the human cerebral cortex was confirmed by Roberts Bartholow.

신경세포의 작동 에너지, 전기

18세기 말에 전기가 자연의 큰 에너지 중의 하나라는 것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생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여기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 사람이 갈바니(Luigi Galvani, 1737~1798)다(Fig. 1). 개구리 다리에서 신경을 노출하고 전기 자극을 주면 근육이 수축한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갈바니는 전기 자극이 아니라 단지 금속 메스를 갖다 대어도 개구리 다리가 강력하게 수축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아주 약한 전기자극을 신경에 흘려도 강한 근육 수축이 일어나며 근육 자체에 전기를 흘리는 것보다는 신경에 전기를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강력한 근육수축을 만드는 것을 주목하였다.1,2 갈바니는 처음에는 이 현상이 금속이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전기를 포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가 곧 이 생각을 바꾸었다. 즉 이 전기는 신경 자체에 존재하며 금속 메스는 단지 이 전기의 흐름을 촉진한다고 설명하면서 이 전기를 ‘동물성 전기(animal electricity)’라고 명명하였다. 더 나아가 이 동물 전기가 생물 에너지의 근원이고 뇌에서 기원하는 에너지가 신경을 통해서 근육까지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
이렇게 전기 에너지가 생체 에너지라는 주장이 나온 가운데 알디니(Giovanni Aldini, 1762~1834)도 실험을 통하여 그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는 개구리 다리의 근육에 말초신경을 가져다 대어 금속 물체의 접촉 없이도 근육이 수축함을 증명해 보였다. 특히 1798년에 바로 도살된 소의 뇌를 전기 자극하여 소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는 현상을 시연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4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형이 집행된 범죄자 세 사람의 신체를 이용하여 사후 세 시간까지 뇌를 자극하면 얼굴이나 팔다리가 경련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실험은 1803년 영국 왕립외과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s)에서 있었는데, 역시 교수형이 집행된 26세의 사형수의 신체를 전기 자극하여 얼굴 근육이 움직이거나 눈을 뜨는 현상을 관객들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결장을 전기 자극하였을 때 신체 전체가 강한 경련을 일으켜서 사람들이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고 착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Fig. 2). 이러한 실험은 일부는 쇼맨십이 발휘된 것이겠으나 알디니의 의도 자체는 매우 과학적이었다. 그중 하나는 방금 익사한 사체를 전기 자극을 통해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당대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쳐 1818년 매리 샐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주제로도 사용되었다. 이는 실제로 후세에 나타나는 많은 전기치료법의 시초로도 볼 수 있다.5
이러한 주장과 시연에도 불구하고 전기를 측정하는 정밀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1800년대 초반까지는 동물 전기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1820년에 우연히 컴퍼스가 발명되고 이것이 슈바이거(Johann Schweigger, 1779~1857)의 갈바노미터(galvanometer, 검류계)의 개발로 이어지면서 전기 존재의 증명이 가능하게 되었다.6 처음 만들어진 갈바노미터는 자기화된 바늘을 허공에 매달고 주변을 구리로 만든 코일로 감는 형태였다. 만일 전기가 없다면 자기화된 바늘은 자연히 북쪽을 가리키겠지만 만일 전기가 구리 코일에 흐르면 동시에 자기가 발생하여 바늘의 방향이 변하므로 전기의 존재를 알게 되는 형태였다. 노빌리(Leopold Nobili, 1784~1835)는 개선된 갈바노미터로 1827년 최초로 개구리 다리에서 전기의 흐름을 측정하였다. 1843년에는 듀보아-레이몬드(Emil Heinrich du Bois-Raymond, 1818~1896)가 좌골신경(sciatic nerve)을 전기 자극하여 음전위 영역의 전기가 신경줄기를 따라 내려가는 것을 기록하였다. 이는 신경 임펄스(nerve impulse)의 존재를 증명한 것일 뿐 아니라 그 임펄스가 전기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최초의 실험이다.
연이어 1850년도에는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가 최초로 신경 임펄스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기에 이르렀다.7 당시에는 막연하게 전기의 빠른 속도를 감안하면 신경 임펄스의 속도도 빛의 속도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헬름홀츠는 좌골 신경을 40 mm 정도 노출한 후에 갈바노미터와 크로노미터를 특정 지점에 장착하여 신경의 한 지점을 지나는 전기 신호를 기록하고 이후에 근육이 수축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여 신경 임펄스의 속도를 계산하였다(물론 여기에는 신경과 근육 전달 과정에 걸리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어 약간의 오차가 있다). 그 결과 신경 임펄스의 속도가 소리의 속도보다도 10분 1 정도로 느리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신경 임펄스 전달은 단순히 전기가 전선을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물리‧화학적 과정이 개입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갈비니가 동물 전기 에너지를 발견한 후로부터 딱 60년이 경과한 시점에 이루어졌다.
한편 뇌에서 직접 자연발생적인 전기현상을 측정한 사람은 캐튼(Richard Caton, 1842~1926)이다.8 캐튼은 원숭이 뇌 피질을 자극해서 운동 피질을 찾아낸 페리에(David Ferrier, 1843~1928)와 에딘버러에서 같이 수학한 사이로, 말초신경에 사용하는 자극기와 갈바노미터를 이용하여 원숭이와 토끼의 대뇌 전기활동을 측정하였다. 그는 대뇌 각 부분마다 아주 작지만 전기가 각 방향으로 흐르고 대뇌피질이 하부에 비하여 양전위를 띠는 것을 발견하였다. 캐튼은 더 나아가 이러한 전기가 대뇌 각 부분의 기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캐튼의 이러한 세심한 관찰과 통찰력 있는 생각은 잘 알려지지 않다가, 버거(Hans Berger, 1873~1941; 인간의 뇌파를 최초로 기록)가 1929년에 공개적으로 캐튼의 업적을 인용하면서 비로소 세상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캐튼은 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골상학과 뇌기능의 국소화

골상학의 창시자이자 대표자는 갈(Franz Joseph Gall, 1758~1828)이다(Fig. 3). 그 때까지의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영혼만을 갖고 있다는 상식적이고도 종교적인 믿음 때문에 기억과 같은 특별한 기능이나 인간의 성품이 뇌의 각기 다른 부분에 분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갈은 인간의 다양한 의식 기능과 인성이 뇌의 각 부분의 특정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의 두개골은 그 안에 있는 뇌의 모양에 따라 변할 것이고 이에 따라 두개골의 형태를 연구하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추론하였다.9 갈은 원래부터 관상학(physiognomy)에 관심이 많았는데, 9살 때 눈이 튀어나온 동료 학생이 문장 암기력이 매우 뛰어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후 대학에서 비슷하게 눈이 튀어나온 학생에게 비슷한 능력이 있는 것을 보고 눈 뒤의 전두엽이 이러한 문장 기억력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갈은 1790년대 초반부터 의사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이 사람들의 인상 및 두개골 형태와 성격적인 특징을 연관짓는 시도를 하였다. 여기에는 작가, 미술가, 정치인 등과 같은 유명인뿐 아니라 범죄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또한 죽은 사람의 두개골, 특히 범죄로 처형당한 사람들의 두개골을 통해 범죄 경향을 보이는 뇌의 특징(두개골의 특징)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과 당시 비엔나 경찰의 도움으로 갈은 1800년대 초반에 이미 300개 이상의 두개골을 수집할 수 있었다. 특히 갈은 자기 집을 포함한 다양한 장소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했는데 강연 중에 나오는 성적인 내용과 근본적으로(하나의 영혼을 이야기하는) 종교와는 잘 맞지 않는 점 때문에 결국 오스트리아에서는 강연 금지 조치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 조치는 오히려 갈을 더 유명하게 만들어서 이 때부터 갈은 활동무대를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확장하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10
갈은 총 27개에 달하는 인간의 인지 및 성품 구성 요소들이 각기 다른 대뇌피질 영역에 분포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중 19개는 동물에도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Fig. 4). 예를 들어 파괴적 본성은 귀 위쪽 부분에 위치한다고 설명하며, 이를 뒷방침하는 소견으로 포식자 동물에서 이 영역이 가장 넓고, 동물을 고문하는 사람이나 사형집행인에서도 이 부분이 두드러져 나타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렇긴 해도 이 영역들이 대뇌피질에서 아주 뚜렷한 경계선을 그리거나 골상학으로 이 모든 것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현재 시점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될지는 몰라도 갈은 나름대로 정밀한 관찰을 토대로 결론을 내고자 노력하였고, 실제로 많은 임상 사례도 설명하고 있다. 대뇌피질의 각 부분이 각기 다른 기능에 주로 특화되어 있을 수 있다는 골상학의 생각은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단지 뇌의 기능에 따라 두개골의 모양이 달라질 것이라는 잘못된 가설이 전체 이론을 우습게 만들었을 뿐이다.
갈의 추종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는 스푸르츠하임(Johann Spurzheim, 1776~1832)이다.11 그는 갈과 더불어 1812년에 골상학에 대한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나 1813년부터 의견 차이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렇기는 해도 골상학은 이 두 사람이 같이 정립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사람은 골상학에 대해 이론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많은 신경 해부도 직접 시행하였다. 보통 신경 해부가 수술용 메스로 시행되는 것과는 달리 이 둘은 뇌 전체를 알코올로 고정한 후에 통째로 이를 끄집어 내고 손가락으로 뇌 각 부분을 일일이 분류해서 구분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뇌 백질(white matter)이 파이버(fiber)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파이버가 뇌 아래(연수) 쪽에서 시작되어 뇌 피질 쪽으로 올라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 파이버 중 중요한 것이 인간 의식의 각성에 중요한 망상활성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파이버들이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대뇌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내려가면서 연수에서 교차하여 반대쪽 척수에 도달하는 것을 확인하였다.12 이 전부터 알려진 한쪽 대뇌의 이상이 반대쪽 신체 증상으로 나오는 것에 대한 해부학적 근거를 제시한 셈이다. 그 밖에도 여러 뇌신경(cranial nerves)의 경로를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신경해부학적 기여는 자세하고 정확한 대뇌피질의 골과 이랑의 구조를 묘사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대뇌피질이 주름으로 인해 얼마나 표면적이 넓어지는지를 보여주었으며 더 나아가 대뇌피질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구조물이 아니라 여러 기능을 하는 구조물들의 결합체라고 생각하였다.
골상학자들의 이러한 노력을 보면 골상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비웃음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8세기까지의 전반적인 믿음이었던 뇌는 하나의 통일된 기관이라는 가설을 벗어난 점, 그리고 일부의 뇌 기능과 특성은 인간과 동물이 같이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진화론이 나오기 한참 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시대를 선도하는 사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13 특히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본성이 수정되고 발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하여, 범죄인의 교화와 도덕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회적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개인의 골상을 분석하여 부족한 특성을 찾아내고 개인별 맞춤형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다. 이 지점에서 스푸르츠하임과 갈의 의견이 갈라지게 되는데, 갈은 인간의 본성이 악한 쪽에 기울어 있다고 본 반면에 스푸르츠하임은 선한 쪽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성악설과 성선설을 보는 듯하다. 이에 따라 갈은 교정 쪽에 무게를 두었고 스푸르츠하임은 선함을 확장시키는 쪽을 강조하였다. 이 외에도 스푸르츠하임은 갈이 제시한 27개 영역을 35개로 확대하였으며 많은 저술과 강연을 통해서 골상학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골상학자들이 임상 사례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사실과 거리가 있다. 예를 들어 이 두 사람은 왼쪽 전두엽에 외상을 입은 사람에게서 단어 기억력이 감소하고 우측 편마비가 있는 것을 확인하여 이러한 기능이 뇌 한 쪽에 위치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례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반하는 임상 사례를 완전히 무시하기도 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의사들도 골상학에 관심을 갖고 벨(John Bell, 1796~1872)과 칼드웰(Charles Caldwell, 1772~1853)을 중심으로 1822년에 필라델피아에 중앙골상학회(Central Phrenological Society)를 설립하였다.14,15 하지만 이러한 관심을 곧 기운을 잃었고, 갈이 사망하는 1828년에 이 학회는 해산되고 만다. 스푸르츠하임은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미국에서의 골상학의 발전을 위하여 미국으로 건너가 일반 대중과 의사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며 강연을 이어갔다. 불행히도 그는 이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 장티푸스로 사망하게 된다. 스푸르츠하임의 뇌는 이후 알코올에 고정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으며 그의 뇌는 평균에 비하여 300 그램 가까이 무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두개골은 현재 하버드 의대에 보관되어 있다.16
골상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다른 인물로 콤(George Comb, 1788~1858)이 있다.17,18 그는 변호사였다가 골상학의 전도사가 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는데, 처음 에딘버러에서 스푸르츠하임의 골상학 강의를 듣고 매료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1820년에 에딘버러 골상학회(Edinburgh Phrenological Society)를 창립하였고 1827년에 골상학에 관한 내용으로 ‘인간의 구성(The Constitution of Man)’을 써서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1900년까지 성경을 포함해서 가장 많이 팔린 책 3위에 해당될 정도였다. 이를 통해서 골상학은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콤도 스푸르츠하임과 마찬가지로 대중교육의 중요성과 범죄인의 교화를 강조하였다.

골상학의 몰락과 전체론의 반격

그러나 갈과 스푸르츠하임의 죽음 이후로 골상학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에는 저명한 생리학자인 플루랑스(Marie-Jean-Pierre Flourens, 1794~1867)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19 그는 여러 동물에서 뇌 일부분을 제거하는 것이 동물의 기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관찰한 실험으로 유명하다. 이 실험은 특히 조류에서 많이 시행되었는데 뇌 일부분을 절제해도 잠시 기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새들은 곧 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토대로 플루랑스는 뇌는 전체가 균일하게 같은 기능을 한다고 주장하였다(Fig. 5). 이러한 결론은 물론 새나 개구리와 같은 하등 동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주된 원인이지만 어찌 되었든 당시에 뇌의 기능 세분화를 주장하던 골상학자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가 되었다. 플루랑스는 실험을 매우 중요시하여 동물의 뇌를 각 부분별로 제거하기도 하고 전기 자극을 주기도 하면서 그 영향을 평가하였다. 그는 이러한 실험과 그에 따른 행동 변화를 상세하게 기술한 ‘척추동물의 신경계 기능의 특징을 연구한 실험’이라는 책을 1824년(1842년 증보판)에 발간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플루랑스는 소뇌가 운동 조절의 기능을 가지며 연수에는 생명 유지의 기본 기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다만 대뇌에서는 여러 절제 실험에서도 대뇌 기능 분화의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두개골을 계속 모으는 갈을 광인에 가까운 인물로 취급하였다. 당시 비엔나 사람들은 사후에 자신의 두개골이 갈의 벽장 속에 수집품으로 들어갈 것을 걱정하여 두개골이 갈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유언을 하는 일들까지 있었다. 플루랑스는 이런 내용을 저서에 소개하면서 갈의 행동을 비난하였다.20 다른 저서에서는 스푸르츠하임을 희화화하고 있는데 당시 스푸르츠하임이 저명한 물리학자인 라플라스의 두개골을 보기 위해 해부생리학자인 마젠디(François Magendie, 1783~1855)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주인의 농간으로 정신지체인의 두개골을 라플라스의 것으로 평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스푸르츠하임이 여전히 이 두개골의 위대함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을 자신의 저서에 반복적으로 기술한 것을 보면 플루랑스는 골상학에 지나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골상학의 몰락과 플루랑스의 실험은 골상학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일반적인 믿음, 즉 뇌는 전체가 하나의 영혼을 구성하는 통일된 기관이라는 전체론이 다시 힘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과학의 발전은 기존의 신화와 같은 굳건한 믿음에 반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고 그것을 증명해 나가 결국 그 신화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는 가설에 해당되고 증명해 나가는 과정이 실험 및 관찰이 되는 셈이다. 기존의 통념인 뇌가 전체로 작동하며 이 전체가 인간의 마음과 성격, 영혼을 이룬다는 생각에 반기를 든 혁명적인 아이디어로 시작된 것이 골상학이다. 즉 뇌의 각 부분이 다른 기능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생각을 입증하는 방법으로 사람의 두개골 모양을 연구한 것이 오류의 시작이었다. 사실 이 아이디어와 증명 방법 사이에는 중간 가설이 있는데 뇌 기능과 모양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각각의 특징적인 뇌 모양은 두개골 모양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두개골의 형태를 관찰하면 각 인간의 특징적인 뇌 기능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그릇된 가설에 따른 방법론을 만나 결국 스러지고 말았지만 그 아이디어만은 이후 뇌 연구에 계속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을 놓고 갈로 대표되는 골상학은 올바른 아이디어와 잘못된 방법이 결합된 것으로, 플루랑스로 대표되는 전체론은 올바른 방법과 잘못된 아이디어가 만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플루랑스는 골상학에 대한 반대와는 별개로 그 뒤로도 연구를 계속하여 뇌 연구 역사에서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된다.21 우선 돼지의 소뇌를 절제해 나가는 방법으로 소뇌의 기능을 연구해 나갔다. 플루랑스는 소뇌의 일부분을 제거하면 돼지의 보행에 살짝 변화가 생기고 많은 부분을 제거하면 마치 술에 취한 것과 같이 되고, 소뇌를 완전히 제거하면 돼지가 전혀 움직이거나 서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토대로 플루랑스는 소뇌가 운동기능과 자세를 조절하는 기관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뇌 연수의 기능을 조사하였는데 연수에 손상을 주면 호흡이 멎어 동물이 사망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범위를 좁혀가며 손상을 주는 방법으로 이러한 기능을 하는 자리가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이 밖에도 귀의 세반고리관의 역할을 밝혀내기도 하였다.

뇌 국소화 이론의 재등장

처음으로 널리 인정을 받은 국소화된 뇌기능은 언어 기능이다. 이전부터 뇌 전두엽에 이 기능이 위치한다는 주장에 논란이 있어 왔는데 유명한 프랑스의 신경학자인 브로카(Paul Broca, 1824~1880)가 1861년에 결정적인 증례를 보고하여 사실로 인정받게 되었다(Fig. 6). 이미 보일라우드(Jean-Baptiste Bouillaud, 1796~1881)는 1825년에 임상 관찰과 부검을 통하여 언어가 기능별로 뇌의 다른 곳에 분포할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특히 ‘뇌 앞부분’이 언어를 생산하는 곳이라고 하였다.22,23 특히 혀의 마비 등의 운동장애가 이러한 언어장애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즉 언어 중추와 혀, 입의 운동을 관장하는 뇌는 인접하기는 하여도 다른 것이라고 말한 셈이다. 이러한 통찰력 있는 주장에도 보일라우드의 견해는 그가 골상학에 관여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그가 사용한 ‘뇌 앞부분’과 같은 애매한 표현도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다가 병리학자인 안드랄(Gabriel Andral, 1797~1876)의 경우 전두엽 뇌 손상이 있는 37명 중 21명에서만 언어장애를 확인하였다고 보고하였고(이 보고에는 좌우 뇌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마도 우측 전두엽 손상 환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뒤쪽 뇌 부분에 병소가 있는 경우에도 언어장애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어 보일라우드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이 때의 분위기는 다수를 차지하는 전통적인 진영에서는 플루랑스의 전체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국소화를 지지하는 쪽이 소수이면서 진보적인 그룹이었다.
이런 논란은 신경학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레보른(Monsieur Leborgne)씨가 브로카의 환자로 입원하게 되면서 끝나게 된다.24 이 환자는 20년간 뇌 손상을 입은 채로 뇌전증을 앓아 왔다. 특히 말을 하지 못하고 우측 편마비가 있었다. 이 환자는 당시 탠(Tan)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유는 발성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 ‘탠’이었고 심지어 ‘탠, 탠, 탠……’과 같이 긴 문장을 이야기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말을 하지는 못해도 레보른씨는 말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브로카의 병동에 온 지 6일 만에 레보른씨는 사망하였는데, 브로카는 부검을 통해서 뇌 좌반구의 세 번째 전두회를 따라서 달걀 크기의 뇌 손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Fig. 7). 이러한 사실은 부검 후 바로 다음 날 인류학회에서 발표되었고 이후 해부학회에서 재차 발표되면서 언어 중추를 국소화한 것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브로카는 이후 2년에 걸쳐 8명의 유사한 환자를 발견하여 언어중추 국소화설을 뒷받침하였다.25 브로카의 주장이 이전과 다르게 학회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브로카의 개인적인 명성과 평판, 레보른씨 증례의 자세한 기술, 그리고 기존의 골상학이 주장했던 위치와 관계가 없는 점, 마지막으로 학회의 보다 전향적인 자세 등이 합쳐진 결과였다.

뇌 국소화 이론의 또 하나의 이정표: 대뇌 운동피질의 국소화

브로카의 언어 중추 발견이 뇌 국소화 이론의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면, 그로부터 9년 뒤의 대뇌 운동피질의 발견은 이 이론에 더 큰 탄력을 부여하였다. 브로카의 발견이 임상적인 관찰과 부검을 통한 것이었다면 대뇌 운동피질의 발견은 실험 기법에 의한 것이었다. 이 발견을 한 사람은 정신과 교수였던 히칙(Eduard Hitzig, 1838~1907)과 해부학자인 프리트쉬(Gustav Fritsch, 1838~1927)다.17 원래 히칙은 환자 치료 목적으로 1867년에 일종의 생체 전기자극기를 만들었는데, 우연히 환자 후두엽 부위를 자극하였을 때 눈 운동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결과를 보고 대뇌 기능의 평가에 전기자극기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고, 여러 실험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한동안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들과 별도로 토드(Robert Todd, 1809~1859; 발작 후에 운동피질의 마비로 몸 어느 한 곳이 마비가 되는 Todd palsy의 그 토드다)는 뇌간을 자극하기 위하여 전극을 삽입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대뇌피질을 자극하였고 이 때 불수의 적인 근육의 떨림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당시 토드는 이러한 실험 결과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고,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1848년의 토드의 이 실험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또 한 사람 헐링 잭슨(Hurling Jackson, 1835~1911)도 1863년에 오른쪽 마비 환자의 뇌전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대뇌 운동피질의 존재를 주장한 바 있다(뇌전증에서 관찰되는 Jackson’s march는 이 잭슨을 기념하는 것이다). 만일 히칙과 프리트쉬가 이런 사실들을 미리 알았더라면 대뇌피질 존재의 발견이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마침내 1870년에 히칙과 프리티쉬는 개를 대상으로 역사적인 실험을 하게 된다. 이 실험은 당시 베를린 대학이 실험을 허가하지 않아 프리드쉬의 개인 주택에서 시행하였다. 이 둘은 마취하지 않은 개의 두개골을 절제하여 뇌를 노출시키고 약한 전기를 직접 대뇌피질에 흘려 넣는 방법으로 발, 얼굴, 목의 근육 수축(물론 반대쪽 근육들이다)을 확인하였다. 이와는 별개로 대뇌 운동피질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일부분씩 절제하여 반대쪽 특정 부위에 마비가 오는 것도 관찰하였다. 이 때 감각신경은 손상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였다(반대쪽 몸 부위를 자극하여 개가 반응하는지를 평가하면 된다). 이전까지 개를 통하여 비슷한 실험에서 이러한 결과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은 사람과 달리 개의 대뇌피질이 안쪽으로 접혀 있어서 노출하기가 어렵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이후로도 히칙은 개와 원숭이를 대상으로 연구를 계속하는 동시에 프랑스 전장에서 부상한 병사에서 대뇌피질의 농양과 뇌전증 발작, 그리고 실어증 등을 관찰하면서 대뇌기능의 피질 국소화의 근거를 계속 마련해 나갔다.
사람에게서 대뇌피질 자극에 의한 뇌기능의 국소화는 미국의 바트홀로우(Roberts Bartholow, 1831~1904)에 의하여 시행되었다.26 그는 심한 두개골 괴사로 이미 대뇌가 겉으로 드러난 환자(Mary Rafferty)의 뇌경막과 대뇌피질을 직접 자극하였고(침 전극을 사용), 반대쪽 팔다리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높은 강도의 자극을 주고 난 후 환자는 발작과 더불어 3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후 잠깐 깨어났다가 바로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 바트홀로우는 환자의 동의를 받았고 어차피 두개내 농양을 배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설명하였으나, 위중한 환자를 대상으로 인체 실험을 한 것에 대하여 유럽과 미국에서 큰 비난을 받았다.

NOTES

Conflicts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Author contributions

All work was done by Lee SK.

Acknowledgements

None.

Fig. 1.
Luigi Galvani (1737-1798). Lithograph.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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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Experiment of Giovanni Aldini (Essai théorique et expérimental sur le galvanisme, avec une série d'expériences. Faites en présence des commissaires de l'Institut National de France, et en divers amphithéâtres anatomiques de Londres par Jean Aldini). License: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CC BY 4.0).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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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Franz Joseph Gall. Lithograph by Zephirin Belliard.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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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Phrenology: chart. License: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CC BY 4.0).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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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Phrenology Examined by Marie-Jean-Pierre Flourens. Translated from the second edition of 1845, by Charles De Lucena Meigs. 1846.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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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Portrait of Pierre-Paul Broca. License: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CC BY 4.0).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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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The case of Broca’s aphasia in the literature (Revision de la question de l'aphasie : l'aphasie de 1861 à 1866 : essai de critique historique sur la genèse de la doctrine de Broca/par Pierre Marie). 1906. Wellcom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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