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연구의 역사 3: 17세기,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어디에

The History of Neuroscience 3: Where Were the Human Mind and Soul in the 17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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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ia: Epilepsy Commun. 2021;3(1):1-6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1 March 15
doi : https://doi.org/10.35615/epilia.2021.00171
Department of Neurology,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Seoul, Korea
이상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과학교실
Corresponding author: Sang Kun Lee, MD, PhD Department of Neurology, Seoul National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101 Daehak-ro, Jongno-gu, Seoul 03008, Korea Tel: +82-2-2072-2923 Fax: +82-2-3672-7553 E-mail: sangkun2923@gmail.com
Received 2021 January 13; Revised 2021 February 2; Accepted 2021 February 2.

Trans Abstract

The 17th century was the period of searching for the human soul. The most prominent philosopher at this period was Rene Descartes. He abandoned the old Greek philosophy and ushered the start of new thinking to find the truth. He also put cornerstone for the mathematical understanding of the world and the importance of the scientific experiment. He proposed the mind-body dualism to explain the mechanism of behavior of the living things. By Descartes, the two types of substances existing in the world were the physical and the mental ones. The only human soul could not be examined directly and had the power of self-determination and consciousness. Thomas Willis, the father of modern neurology, published the monumental book in the history of neuroscience, ‘Cerebri anatome.’ Willis stressed the role of cerebral gyri exercising human memory, imagination and voluntary action. He even suggested the gray substance of gyri as the area of pro-creation of animal spirit. He divided the brain into different functional parts based on pre-existing theories, clinical cases, and comparative neuroanatomy. Another important pioneer of the 17th century was Niels Stensen. He emphasized the meaning of the organization and development of brain. He suggested that the brain should be organized in a special way not to execute many different functions chaotically. He stressed the implementation of many different scientific approaches including pathology, development, and comparative neuroanatomy to see the organization of brain. The microscope developed during this period would be the basis for the upcoming time of enlightenment of neuroscience.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인간의 영혼은 몸과 다른 차원에 있다: 마음과 몸의 문제(mind-body problem), 마음과 몸의 이원론(mind-body dualism)

데카르트(Fig. 1)는 기존의 지식체계를 뿌리부터 의심스럽게 보면서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최초의 현대적인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1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하여 침대에서 책을 읽거나 사색하면서 보낸 많은 시간이 데카르트에게는 새로운 생각의 기회를 주었고, 이 습관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후 법률학 공부를 마치고 많은 경험을 얻기 위하여 군대에 자원 입대하게 된다. 혹독한 병영 환경 속에서 일련의 세 가지 꿈을 꾸게 되는데, 첫 번째 꿈은 학교 근처를 지나다가 강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리고 환영에게 협박을 당하는 꿈이었고, 두 번째 꿈은 엄청나게 큰 천둥 소리에 놀라서 눈을 떴다가 옆에 있는 촛불을 보고 안심하고 다시 잠이 드는 꿈이었다.2 세 번째는, 탁자에 놓인 커다란 사전과 고대 라틴어 시집을 펼쳐 ‘어떤 인생의 길을 선택한 것일까?’라는 시구를 읽으며 모르는 사나이와 대화를 나누는 꿈이었다. 데카르트는 이 세 가지 꿈을 통해 학문과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결론짓고 1621년 군대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후 주로 네덜란드에서 머물면서 많은 사상을 발표하게 된다.

Fig. 1.

Portrait of Rene Descartes by Frans Hals, 1649 (Le musée du Louvre, Paris, France).

데카르트는 우선 세상 대부분의 자연 현상은 단순히 기계적이고 물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실험보다는 직관에 의존하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부정하였다. 실험을 통해 무게가 다른 물건들이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현상도 확인하였다. 그러나 교회로부터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무리라고 비난을 받은 갈릴레오의 처지를 듣고 이 관찰의 발표를 보류하였다. 결국 이 통찰력 있는 주장은 데카르트 사후 14년이 지나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의 공식적인 첫 저서는 ‘방법에 대한 담론(Discourse on Method, 1637)’이 된다. 이 저서에서 데카르트는, 과학적 사고는 필수적으로 확실하고 반박 불가능한 사실에 기초하여 설명되어야 한다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여기에서 내가 사는 세상과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상상력의 산물이나 허구가 아니고 과연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발생하였고, 이에 대하여 데카르트는 ‘내가 지금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만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진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의식의 개념을 정의할 때 현재까지도 개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음을 감안하면 통찰력 있는 주장임에 틀림없다.

데카르트를 훌륭한 과학자로 생각하게 되는 다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수학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사물의 진리를 제공한다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는 해석기하학이라는 방법을 개발하여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고자 하였고 이는 뉴턴과 라이프니치의 미적분학의 개발로 이어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질적인 세계는 수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가 현대 과학의 시작을 알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과학자인 데카르트도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며, 수학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면서 기계적인 작동기전을 갖는 세계를 창조한 것은 여전히 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사상은 무신론과 상당히 근접한다는 판단을 받아 1660년에는 가톨릭교회로부터 그의 저서들이 금서로 판정받기에 이르렀다.2

데카르트는 그러나 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물질세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가 존재하며, 그것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이라 생각하였다.3 그리고, 인간만이 진정한 의미의 영혼을 갖고 있으며 동물들을 포함한 다른 생명체들은 마치 시계와 같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반응하는 기계장치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동물의 영혼은 뇌실에 위치하며, 화학적 입자로 구성된 액체가 한편으로는 영양분을 공급하고 한편으로는 신경 에너지로 사용된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영혼을 가진 인간과 달리 동물들은 단지 특수화된 화학적 입자에 의해 자동화된 반응과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데카르트는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결론적으로 의심하고, 확인하고 이해하며, 부정하고 의지를 갖는 것, 그리고 거절할 수 있고 상상하며 느낄 수 있어야만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경우에만 마음을 갖고 있다고 규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진정한 의미의 영혼은 관찰이 불가능하며 오로지 인간만이 이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Fig. 2). 데카르트의 유명한 이원론 또는 ‘마음과 몸의 문제’가 여기에서 탄생하였다. 그에게 세상은 두 가지의 다른 물질, 즉 관찰 가능한 물질적인 것(동물의 영혼을 포함하여)과 관찰 불가능한 인간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데카르트의 마음-몸 이론은 마음과 몸의 작동 원리와 상호 관계를 설명하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이론이었다.

Fig. 2.

Descartes’ scheme of mind showing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 and animal spirit and the role of pineal gland.

데카르트는 인간의 영혼만이 영원불멸이고, 육체 없이도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며, 영혼은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믿었다.4 또한 다른 동물들은 단지 자동 기계처럼 움직이는 상태로, 심지어 통증도 느끼지 못한다고 하였다. 동물들이 통증으로 움츠리거나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은 자동화된 반응으로 진정한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 믿음으로 인해 데카르트는 개와 같은 동물들을 마취 없이 산 채로 해부를 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비록 ‘반사’라는 말을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나, 처음으로 반사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으로 데카르트를 언급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뜨거운 것이 닿아 발을 반사적으로 빼는 행동은 전형적인 자동화된 행동이며 뜨거운 것이 닿아 피부가 벗겨지면 몸 안의 섬세한 관이 당겨지고, 이로 인해 뇌실의 밸브가 열리며 이것이 발을 당기게 되는 행동으로 연결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영혼의 존재는 필요치 않다고 하였다. 흥미롭게도 데카르트가 사람과 동물이 같이 갖고 있다고 주장한 반사적인 행동들은 소화작용, 혈액순환, 성장, 호흡, 수면, 감각과 움직임 등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상, 기억, 감정 등과 같은 고차원 기능도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라면 영혼과 육체의 교류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이 작용을 하는 기관으로 뇌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송과체(pineal gland)을 지적하였다(Fig. 3).5 그의 의견에 따르면 대부분의 뇌 구조물이 쌍을 이루고 있는 데 비하여 송과체는 하나만 있고, 뇌실 및 뇌 중앙에 송과체가 위치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이 송과체를 빠르게 진동시키고 이로 인해 기계적인 작용을 하는 부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Fig. 3.

Location of pineal gland.

데카르트의 주장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데카르트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현명한 엘리자베스 공주(Princess of Palatine, Bohemia)는 편지에서 이러한 이원론에 대하여 ‘우리의 경험과 생각이 우리의 몸과 긴밀하게 엮여 있음’을 강조하며 ‘마음-신체 이원론(mind-body dualism)’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외에도 덴마크의 신학자인 니콜라스 스테노는 대부분 동물의 송과체가 인간에 비하여 크다는 점을 들어 인간 영혼의 교류를 담당하는 송과체의 역할에 의문을 표시하였다. 그래도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오랫동안 서양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1950년대 초반에 일련의 과학자들이 마음과 뇌가 하나임을 주장하는 ‘동일성 이론(identity theory)’을 주장할 때까지도 살아남았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이 뇌라는 물질에서 기원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데 있다. 가장 적절한 생존을 위해서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오면서, 몸은 뇌에 신호를 보내고 뇌는 이에 맞는 지시를 몸에 내리며, 다시 몸이 이에 반응하여 교정된 신호를 뇌에 보내는 식으로, 뇌(마음)의 형성에 있어서 몸은 필수 불가결한 역할을 해왔다. 인간의 사고와 마음은 몸이 이렇게 주위 환경과 소통하면서 진화한 결과물이고, 만일 몸과 마음의 이러한 상호 교류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6 따라서 데카르트의 ‘나는 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선언은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사고한다’라고 바뀌어야 마땅하다.

데카르트는 1649년에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의 개인 교사 자격으로 초청을 받아 스톡홀름에 머물게 된다. 불행히도 스웨덴의 혹독한 날씨와 아침 5시부터 시작되는 개인 교습으로 인해 1650년에 폐렴에 걸려 이른 죽음을 맞게 되었다(수면은 면역 기능에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의 위대성은 마음과 몸을 분리한 이원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물론 이것도 뛰어난 성찰의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물질은 입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물질적인 세계는 수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과 단지 특수화된 화학적 입자가 자동화된 반응과 행동을 만들 수 있는 ‘동물 영혼(animal spirit)’의 작동 기전을 생각해 냈다는 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 윌리스(Thomas Willis, 1621~1675)

인간의 지능과 영혼은 대뇌에

데카르트가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주장하며 형이상학적 영혼의 존재를 주장한 데 반하여 토마스 윌리스(Fig. 4)는 인간의 기억과 의지가 대뇌의 이랑(cerebal gyri)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였다.7 1664년에 발간된 그의 유명한 저서 ‘뇌 해부(Cerebri Anatome)’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는 달리 뇌의 단순한 해부학 책이 아니라 대부분 뇌의 기능적인 측면을 논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문에서 윌리스는 ‘나는 다른 사람이 걸어온 길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을 것이며, 이전에 언급되었던 것을 반복할 생각도 없다’고 천명하며 새로운 시각과 이론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여러 다른 학자와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많은 그림은 Christopher Wren이 그렸고, Robert Boyle이 알코올로 뇌를 보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하였으며 Richard Lower가 뇌 해부의 상당 부분을 진행하였다.8

Fig. 4.

Portrait of Thomas Wills by David Loggan. Line engraving, published 1674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United Kingdom).

그는 인간의 기억, 의지, 상상력 등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대뇌 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뇌량(corpus callosum)은 감각과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뇌량이 양쪽 대뇌의 중앙 아랫부분에 위치할 뿐 아니라 뇌의 기능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길로 생각되는 연수(medulla, 윌리스는 연수의 이러한 기능을 왕의 고속도로, 즉 king’s highway라고 불렀다) 위쪽에 자리 잡은 점에 주목한 결과였다. 그리고 대뇌 반구는 중요한 고위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 보다 기본적인 생체 기능은 소뇌(cerebellum)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였다. 윌리스의 소뇌는 단순히 현재의 소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보다 광범위하게 교뇌와 중뇌를 포함하는 것으로 상당히 올바른 관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의 생각이 널리 퍼지거나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하였으나 해부학과 임상에 기초한 이론, 즉 뇌가 부분적으로 기능을 달리할 것이며 인간의 생각이 대뇌에 위치한다는 주장은 매우 통찰력이 있는 동시에 역사적으로 뇌과학을 한 단계 더 전진시킨 생각임은 분명하다.

뇌 기능 부분을 제외하고 ‘Cerebri Anatome’의 다른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대뇌 하부의 혈관구조를 밝혔다는 점이다. 대뇌의 하부에는 동물에서 관찰되는 rete mirable 대신에 현재는 ‘윌리스 환(circle or Willis)’으로 알려진 혈관의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서 윌리스는 이 고리의 기능적 중요성도 지적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부검에서 한쪽 혈관이 막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생전에 기능 이상이 없었음을 지적하면서 이 환이 혈관 공급을 위한 문합(anastomosis)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Fig. 5).

Fig. 5.

(A) Circle of Willis. (B) The blood flow from the bilateral internal carotid artery to the circle of Willis. (C) The role of the circle of Wills when one internal carotid artery is blocked.

니콜라스 스테노(Nicolaus Steno, Niels Stensen, 1638~1686)

뇌의 유기적 구조화와 연구 방법론

덴마크에서 태어난 스테노(Fig. 6)는 암스테르담의 Gerhard Blaes (1625~1692) 밑에서 해부학을 배우게 되었다. 이때 양을 단독 해부하는 기회를 갖고 최초로 귀밑샘(parotid gland)의 배출구를 찾아내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후 눈물샘의 배출구도 찾게 되는데 이로써 그때까지의 믿음이었던 눈물이 뇌에서 기원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9 이후 파리로 건너가 26세의 젊은 나이에 뇌 해부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많은 의사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강의에서 스테노는 자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생각되는 뇌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에 대한 강조로 첫 부분을 시작했다고 한다.

Fig. 6.

This bronze monument of Niels Stensen (Steno in Latin) can be found in front of the Faculty Library of Natural and Health Sciences in Copenhagen. The sculpture by Gottfred Eickhoff (1902-1982) and it was unveiled on October 25, 1963.

스테노는 뇌실에 뇌의 기능이 있다는 오래된 믿음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신경계의 성장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뇌가 혼란 없이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하려면 뇌 부분들이 유기적인 구조로 조직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Fig. 7). 뇌 해부 방법에 대해서도 뇌 절편을 만드는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부족하여 뇌를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벗겨 나가는 방법, 뇌 회백질을 분리하는 방법 등을 모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신경 다발을 세심하게 추적하여 신경 다발이 지나가는 장소와 도착하는 장소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바쁜 의사보다는 연구에만 전념하는 전문적인 연구자가 필요하다는 현대적인 생각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인간 뇌 해부 이외에도 병리, 발생학, 다른 동물과의 비교 해부학을 포함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심지어 살아있는 동물을 이용해서 각종 약물이나 독의 작용을 확인하는 실험도 고안한 바 있다.10

Fig. 7.

Display of the brain in Discours sur l’anatomie du cerveau (1669) on sagittal and coronal sections.

고명한 임상의사였던 윌리스에 비하여 스테노는 오로지 연구와 연구방법론에 매진한 인물이다. 윌리스가 주장했던 뇌량 중심설을 스테노는 미심쩍게 보았으며 선천성 뇌수두증 환자에서 뇌량이 없음에도 중요한 뇌 기능에 거의 문제가 없는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하였다. 또 당시 학계의 풍조였던(정확한 확인 없이) 다른 책의 틀린 해부 그림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에도 일침을 가하였고, 윌리스의 책에 있는 이러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래도 윌리스는 이러한 스테노의 지적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스테노의 우수성을 칭찬하기까지 하였다. 스테노는 데카르트의 사상 중에 관찰 없이 사유에 의해서만 내린 결론들에 대해서는 더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예를 들어 송과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송과체는 움직임이 없으며 신경 말단이 이 주변에 위치하고 있지 않고, 동맥이 아닌 정맥이 주로 위치함을 들어 송과체의 역할을 부정하였다. 반면에 데카르트의 자동적, 기계적 뇌 작용 이론은 향후 뇌 기능을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내다보았다.

현미경의 발명

이 시기에 비단 뇌과학 뿐 아니라 모든 의학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기계가 발명되었는데 이 것이 바로 현미경이다.11 당시에는 확대경으로 알려진 현미경은 1590년에 최초로 개발된 것으로 보이며, 1665년에는 현미경으로 사람 털에 붙어 있는 이나 벼룩을 확대한 사진을 포함하여 그 당시의 모든 현미경 사진을 모은 책(Micrographia by Robert Hook)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로버트 훅이 윌리스와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뇌에 대한 확대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대신에 같은 해에 Marcelo Malphigi가 최초로 뇌 구조물을 확대한 사진을 출판하였다. 이 후 1668년에 네덜란드 사람인 Anton van Leeuwenhoek에 의해서 200배까지 확대가 가능한 현미경이 개발되어 이 후 과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엠마뉴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종교와 과학 사이

놀랍게도 뇌의 기능과 관련되어 누구보다도 선견지명을 보여준 학자가 따로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윌리스와 마찬가지로 대뇌의 중요성을 예측하여 대뇌가 인간의 이해, 생각, 판단, 의지의 기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결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뇌의 여러 기능들은 서로 다른 뇌 영역에 분포할 것이며 이렇게 해야만 혼돈 없이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여 미래의 뇌기능 국소화의 발전을 내다보았다.12,13 심지어 뇌의 앞쪽에 운동신경이 위치하고 이 기능은 신체 영역별(somatotopi) 배열을 하고 있다고까지 설명하였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일련의 환시와 꿈(신을 만나거나, 천국과 지옥을 보는 등)을 경험한 후에, 과학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신학자로 인생경로를 바꾸게 된다. 이러한 환시의 의미는(의학적으로는 일시적인 뇌전증 또는 뇌염의 가능성도 있다) 잘 알 수 없으나 신학자로도 크게 존경을 받아 그의 이름을 딴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경로 변경으로 그의 뇌 관련 저술은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고 스웨덴 왕립 문서 보관소에 묻혀 있게 되었다. 만일 그의 업적이 일찍 빛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뒤를 이어 연구를 진행했다면 뇌과학의 발전은 다른 경로를 취했을 수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와 과학을 아우르는 문제는 어려운 일이다.

Notes

Conflicts of interest

No potential conflicts of interest relevant to this article was reported.

Author contributions

All work was done by Lee SK.

Acknowledgements

None.

References

1. Clarke DM. Descartes: a biograph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2. Wickens AP. A history of the brain London: Psychology Press; 2015.
3. Almog J. What am I?: Descartes and the mind-body problem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4. Cottingham J. Descartes Oxford: Blackwell; 1986.
5. Smith CU. Descartes’ pineal neuropsychology. Brain Cogn 1998;36:57–72.
6. Damásio AR. Descartes’ error: 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New York: G.P. Putnam; 1994.
7. Feindel W. Thomas Willis (1621-1675)-the founder of neurology. Can Med Assoc J 1962;87:289–296.
8. Donaldson IM. Cerebri anatome: Thomas Willis and his circle. J R Coll Physicians Edinb 2010;40:277–279.
9. Parent A. Niels Stensen: a 17th century scientist with a modern view of brain organization. Can J Neurol Sci 2013;40:482–492.
10. Finger S. Origin of neurosice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11. David B. The invention of the microscope. Bios 2004;75:78–84.
12. Gross CG. Emanuel Swedenborg: a neuroscientist before his time. Neuroscientist 1997;3:142–147.
13. Akert K, Hammond MP. Emanuel Swedenborg (1688-1772) and his contributions to neurology. Med Hist 1962;6:255–256.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Portrait of Rene Descartes by Frans Hals, 1649 (Le musée du Louvre, Paris, France).

Fig. 2.

Descartes’ scheme of mind showing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 and animal spirit and the role of pineal gland.

Fig. 3.

Location of pineal gland.

Fig. 4.

Portrait of Thomas Wills by David Loggan. Line engraving, published 1674 (National Portrait Gallery, London, United Kingdom).

Fig. 5.

(A) Circle of Willis. (B) The blood flow from the bilateral internal carotid artery to the circle of Willis. (C) The role of the circle of Wills when one internal carotid artery is blocked.

Fig. 6.

This bronze monument of Niels Stensen (Steno in Latin) can be found in front of the Faculty Library of Natural and Health Sciences in Copenhagen. The sculpture by Gottfred Eickhoff (1902-1982) and it was unveiled on October 25, 1963.

Fig. 7.

Display of the brain in Discours sur l’anatomie du cerveau (1669) on sagittal and coronal sections.